실패가 성공이다 -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쇼핑 철학
실패가 성공이다 -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쇼핑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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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콜롬보”를 아십니까? 흑백티비 시대를 사신 분들은 그 옛날 주말의 명화만큼이나 열심히 챙겨보던 수사 드라마입니다. 물론 당연히 미국 드라마입니다. 한쪽 눈에 의안을 한 작은 체구의 형사 콜롬보가 늘 한결같이 헐렁한 트렌치 코트를 걸쳐 입고 살인 사건을 추적하며 단서를 찾고 범인의 행적을 더듬어 가며 골똘히 생각하는 장면이 이 드라마의 아이덴티티입니다.
형사 콜롬보가 드라마에서 입던 그 트렌치 코트를 사냥하기 위해서 드라이빙을 시작했습니다. 구글 맵에 제일 먼저 찍은 좌표는 포트 코퀴틀람의 월마트였습니다.
“그 런던 포그 코트 찾아보러 가자”고 하니 아내가 쌍수를 들고 대환영입니다. 아내 옆에 더 멋진 남자를 세우고 싶어하는 저의 배려와 늘 남편의 차림새에 신경을 쓰는 아내의 욕심이 주파수가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환상적인 영혼의 속궁합. 구토 주의.
그런데 갑자기 웬 트렌치 코트? 밴쿠버 생활 20여년, 한국에 있을 때와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옷차림입니다. 캐나다 와서 산으로 들로 싸돌아다니는 아웃도어 생활을 즐기다보니 평소 차림새도 극도로 케주얼해졌습니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마천루 거리를 거닐면 가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밴쿠버 사람들의 보편적인 차림새가 워낙 자유스럽고 캐주얼하여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동화되었고, 밴쿠버에서의 직업도 정장을 입을 일이 없는 일이다 보니 옷차림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나이들어 생김새가 완전히 뽀대없고 초라하게 변하다 보니, 차림새라도 좀 댄디해져야 사람 대접 받을 수 있겠다 싶어 신발부터 검정색에서 탈출해보고, 양말도 발목에서 많이 올라오지 않는 칼라풀한 양말로 바꿔보고 티셔츠도 와이셔츠급은 아니더라도 조금 더 댄디풍이 가미된 티를 골라입게 됩니다.
그렇게 스타일에 조금 변화를 주고 있던 차에 어제 휘슬러 쪽으로 올라가다 스쿼미시에 있는 월마트에 들려 매장을 둘러보고 있는데 아내가 코트 하나를 들고오더만 입어보라고 합니다. 한 여름에 웬 코트? 한 여름에 코트라서 클리어런스 처리를 하고 있는 중이고 가격은 반값입니다.
코트 안쪽에 붙은 상표를 보니 런던포그입니다. 고급스런 울 재질의 바바리코트는 아니고 저렴한 코트인데, 그걸 보는 순간 형사 콜롬보가 생각나는 딱 그런 스타일의 트렌치 코트입니다. 예전같았으면 웬 코트냐며 일언지하에 "노!"했을 일인데, 마침 때가 스타일 변화를 진행 중인터라 군소리 없이 받아들고 몸에 한번 걸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코트에 팔을 넣는 순간 감이 너무 좋았고 입은 모습도 참 정말 어이없게 한 스타일 하고 있는 모양새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품새가 조금 커서 보니 투엑스라지입니다. 제 상의 사이즈가 라지라서 라지를 찾아 걸쳐보니 어깨쪽이 너무 정확히 꽉 맞아 코트 입은 폼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지와 투엑스라지의 중간인 엑스라지(XL)를 찾으니 없습니다. 베이지색은 엑스라지가 있어서 입어보니 폼은 끝내주는데, 베이지보다 더 허연, 거의 하얀색입니다. 아무리 폼이 나도 수의 같은 그런 코트를 입고 다닐만큼 맛이 간 정신머리는 아직 아닙니다. 그게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기 때문에 흰색 코트에는 사이즈가 남아 있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M 사이즈가 여럿 남아 있었던 것은 작은 체구의 사람에게는 트렌치 코트가 핏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M 사이즈가 여럿 남을 수 있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체구의 형사 콜롬보가 트렌치 코트를 입은 것은 완벽한 연출의 반전입니다. 지금은 트렌치 코트가 콜롬보를 나타내는 강한 캐릭터가 되었지만,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는 핏이 맞지 않는 영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연출하여 드라마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만든 것은 역시 예술가들의 허를 찌르는 안목입니다. 엑스라지가 폼이 너무 나는 것까지 확인을 하니 그 카키색의 트렌치 코트를 획득하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나 크게 남았습니다.
그 짙은 카키색 트렌치 코트 엑스라지 사냥을 오늘 나선 것입니다. 그런 시덥지 않은 스토리였습니다.
그래서 비싼 기름 태워가며, 오늘도 기후온난화에 한 기여하며 찾아간 월마트에서는 그 엑스라지 트렌치 코트를 찾아내었는가?
없었습니다. 스쿼미시 월마트에는 엑스라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더블엑스라지, 라지, 그리고 몇 개의 미디엄 사이즈가 남아있었는데, 포트코퀴 월마트 매장에는 물건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든 생각이 혹시 우리가 찾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디 다른 매장에는 스탁(stock)이 있나 확인해볼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요즘 월마트가 배달 서비스도 활발히 하고 앱도 개선된 것이 생각나 즉시 스마트폰에 월마트 앱을 깔고, 런던포그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물건이 보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누렁이 색깔의 엑스라지 사이즈가 재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구매와 배달 서비스가 지원이 됩니다. 그리고 클리어런스 제품이라 가격도 반값입니다. 그래서 카트에 담고 온라인 결재를 했더니 다음 주에 집으로 배달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원하는 매장에서 픽업하는 옵션도 있는데 그게 오히려 매장에서 잘 챙기지 못하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어 그냥 배달 옵션으로 오더를 했습니다.
원래는 포트 코퀴틀람 월마트에 들렸다 없으면 미션(Mission) 월마트를 찍고 다리를 건너, 아보츠포드(Abbotsford)와 랭리(Langley) 월마트까지 뒤지는 대장정을 계획했었는데, 다행히 그렇게 싱겁게 일이 종료되어 기름값을 크게 아끼고 기후온난화 방지에도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무지하게 뜨거운 날입니다. 월마트 옆에 있는 코스코에 들려 엔진오일을 구입하고 또 그 앞에 있는 한인마트에 들려 빠삐코를 사서 입에 물고 시원하게 기분 좋게 포트 코퀴틀람을 떠났습니다.
형사 콜롬보 트렌치 코트를 득템하는데 성공하여 차를 미션 쪽으로 향하지 않고, 랭리 쪽으로 건너 가지도 않고 집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오는 중간에 코귀틀람의 아키아(Ikea)에 들렸습니다. 아키아에 들려 우선 밥을 사먹었습니다. 메뉴는 플랜트볼나초(Plant Ball Nacho)를 선택했습니다. 커피는 스마트폰에 다운된 아키아 패밀리 코드를 보여주면 무료입니다. 커피 두 잔, 3불을 아낄 수 있습니다.
주방에서 열심히 서빙하는 프런트 쉐프를 보니 인도 젊은이입니다. 망한 영국, 2차 대전 이후 지구 주도권을 미국에게 넘겨준 영국, 근현대 지구 역사에서 영국은 욕 먹을 짓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인도에 행한 폐악도 이루다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일 겁니다. 영국에 그런 약탈을 당한 인도인들이 캐나다에 와서는 곳곳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일도 정말 열심히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로 이민 가든 언어 때문에 바로 즉각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이민 가도 평생 영어 병신, 장애자로 사는 저같은 한국사람하고는 근본(?)이 다릅니다. 그걸 보면서 인도가 영국에게 먹힌 것이 세월을 돌아 그 후손들에게는 축복(?)이 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인생, 전화위복(轉禍爲福)이고 새옹지마(塞翁之馬)입니다.
밥먹고 매장을 둘러보며 두어가지 물건을 집어들었는데 나오면서 계산하지 않고 다 놔두고 나왔습니다. 자율 계산대를 통과하여 빈 손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아내 눈에 얇은 플라스틱 옷걸이 묶음이 들어왔습니다. 그것 두 묶음을 계산하는데, 결재 최종화면으로 가기 전 화면에 아이스크림이나 핫도그 사먹을래? 지금 같이 주문해? 그런 화면이 나옵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선택하여 같이 결재를 마쳤습니다. 영수증을 들고 떨레떨레 나오는데 아이스크림 판매대 쪽에서 여직원이 영수증 넘버를 부르다 우리를 보더니 바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넘겨줍니다. 눈치 하나는 우주급으로 또이또이한 직원입니다.
물건 다 사지 않고, 당장 필요한 물건만 최소로 산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사야 할 물건을 사지 못한 것이 쇼핑에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지 않아도 될 물건을 사지 않은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래서 쇼핑에 있어서는 이런 말이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패가 성공이다.”
❤️감사합니다❤️
미흡한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주신 성의와 시간 내어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밴쿠버의 시원한 바람처럼 기분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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