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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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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 대통령 윤석열이 불쌍해서 지난 밤 잠 못 이루고 울었다는 어느 할머니 이야기, “대통령이 왕인데, 왕은 하나님이 점지해주는 분인데, 그런 분을 어떻게 탄핵을 하고 파면을 할 수 있느냐? 너무 슬프다. 옛날에는 왕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는데, 국민들이 왜 그렇게 빨갱이 짓을 할 수 있느냐?” 뭐 그런 정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현대 민주국가의 대통령이 왕입니까? 왕의 폭정에 이기지 못해 18세기 유럽에서 혁명의 물결이 일었고, 왕정을 없애고, 수백년간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리는 희생을 치르며 탄생한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그런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인가요? 왕을 주님이 점지해주셨다는 말은 구약에서 선지자를 통해 사울왕에 이어 다윗왕을 점지해준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그런데 사실 주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왕정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왕으로 인해 고통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두기를 원합니다. [삼상8:6-9]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1Sa 8:6-9, NIV] 6 But when they said, "Give us a king to lead us," this displeased Samuel; so he prayed to the LORD. 7 And the LORD told him: "Listen to all that the people are saying to you;...

현대판 이세벨이 한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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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이세벨이 한국에 석열이를 대통령 만들었던 대한민국, 정말 대한민국 국민의 위대한(?) 실수들 중에서 단연 탑입니다. 근현대 역사를 통털어 아마도 가장 큰 실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방 이후에 친일을 척결하지 못했고,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고 독재를 펼친 정권들 때문에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면서 한국의 근현대사가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후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잡는가 싶었는데, 군발이도 아닌 석열이 놈의 쿠데타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다시 수십년 빠꾸(back) 오라이 했습니다. 이번 석열이 탄핵 사건을 통해 나타난 탄핵반대 세력의 행동들을 보면서 친일과 군사독재의 뿌리가 얼마나 한국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지, 그로 인한 해악이 얼마나 큰지 여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반국가 세력에 정신나간 기독교 세력까지 합세하고 있는 현실은 정말 너무나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석열이가 이렇게 위험한 사이코인줄 미리 알았더면 문재인의 정치적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더라고 해도 석열이를 대통령으로 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놈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헛소리하는 것에 홀딱 넘어가 강골이라고 오판하고 검찰 총장에 올린 것이 아주 큰 패착이었습니다. 그 놈은 강골은 커녕 조현병적 성격장애가 있는 놈이었을 뿐입니다. 석열이뿐만 아니라 그 놈 와이프는 석열이보다 더 가관입니다. 성경 구약에 나오는 아합왕의 와이프 이세벨 수준입니다. 악녀 중의 악녀, 마녀였습니다. 잡신을 믿는 것도 꼭 빼어 닮았습니다. 정말 근본을 알 수 없는 여자입니다. 어디서 놀던 지도 알 수 없는 접대부 계집을 대통령 영부인으로 한국인들이 맞이했던 것입니까? 석열이를 대통령으로 뽑은 한국인이나,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놈들이나 오십보백보입니다.  [왕상21:25-26]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없었는데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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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는데 생겼다 “해라.” “해도 된다.” “하지 마라.”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신접 살림을 시작하면서 이들이 주님께 들은 말은 위의 세 가지 중 어떤 것들입니까?  “해라.” 이건 뭘 하라는 명령입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같이 뭘 강제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주님이 이들 부부에게 그렇게 의무를 부여한 말씀은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를 지내라 처럼 그런 의무 사항이 없습니다.  “해도 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너에게 주니, 맘껏 다스리고 마음껏 먹어라. 즉, 놀고 먹어라 혹은 먹고 놀아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초기 직업은 홈리스였습니다. 의무 사항이 없으니 힘들게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고, 국방의 의무를 다할 필요도 없고, 납세의 의무도, 제사를 드리는 의무도 없었습니다.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입은 가죽옷을 위하여 짐승을 잡을 때 그게 제사일 수 있지만 그것도 이들 부부가 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주님이 지어 입히신 것으로 나옵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Ge 3:21, NIV] The LORD God made garments of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하지 마라.” 이들 부부에게 의무는 부여되지 않았지만, 해서는 안되는 일은 주님이 지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그 명령을 어겼습니다. 신의 명령을 어긴 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해라.” 해야 할 의무가 생겼습니다. 농사 일이야 뭐 하든 하지 않든 자기 맘이고, 하지 않으면 굶는 것이고, 그러지 않으려면 할 수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건 반강제적인 일일지 몰라도, 제사는 해야 할 의무 사항이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의무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그 죄를 직접 자기 몸으로 제사를 드려가며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져 주신 십자가 사건이 벌어져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죄의 부담을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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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새찬송가 304장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중의 하나입니다. 단순하고 쉽지만 멜로디가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을 마음에 들게 부르고 있는 동영상을 찾아보는데 쉽지 않습니다. 이 찬양은 단순한 멜로디이고 그래서 부르기 쉽지만 막상 직접 부르려고 하면 악보대로 정확히 부르기 쉽지 않은 찬양입니다. 그리고 찬양은 악보를 보지 않고 외워서 불러야 은혜가 되기 때문에 악보를 정확히 숙지하고 자칫 틀리기 쉬운 그 부분들에서 박자를 정확하게 쳐주고 넘어가야 찬양이 멋지게 들립니다. 아래 동영상은 백점만점에 백점은 아니지만, 이 찬양에서 제가 원하는 부분이 더 있긴 하지만, 그래도 찾아본 영상 중에서는 악보에 가장 충실한 동영상이고, 꽤 잘 만들었습니다. 이 찬양 악보 잘 숙지하고 가사 전부 외워두면 정말 언제 어느 때고 은혜롭게 혼자 혹은 여럿이 부르기 참 좋은 찬양입니다. 아래 악보 중에서 주의할 부분은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입니다. 두 음표 사이에 쉼표가 없습니다. 가사의 두 문장이 이어지는 부분이지만 그냥 8분 음표로 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개의 동영상의 경우, 떼창을 유도하며 쉽게 부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 사이에 마치 쉼표라도 하나 들어가 있는 것처럼 앞 음을 길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주의할 부분은 초록 색으로 표시한 부분과 파란 색으로 표시한 부분인데, 앞의 것은 한 음(4분 음표) 플러스 반음(8분 음표)이고, 뒷 부분은 한음 플러스 한음이어서 앞뒤가 끌어주는 음의 길이가 다릅니다. 연습하여 악보대로 부르는 재미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3절의 가사가 스토리 전개가 있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에 몇번 불러보면 가사가 절로 외워지는 찬양입니다. 여럿이 모여 악보 보지 않고 악보대로 음길이 맞춰가며 부르면 꽤 멋지고 은혜가 되는 찬양입니다. 제 블로그 홈페이지를 열면 블로그의 모든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노트북이나 PC에서 보실...

에델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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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바이스 인터넷 서비스 회사들이 공격적으로 인터넷 공급망을 광케이블로 교체하고 있습니다. 저의 집에 인터넷을 공급하고 있는 텔루스도 4월초에 현재 공급되고 있는 전화선으로 공급되는 인터넷 서비스를 중지할 것이기 때문에 광케이블 선으로 교체하는 일정을 잡으라는 공지를 내었고, 그걸 4월초 오늘로 잡았고, 오전에 그 공사를 했습니다. 이제 광케이블로 서비스되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첨단 유저 대열에 줄을 섰습니다. 텔루스 광케이블 인터넷 광고에서 보던 둥근 통 모양의 모뎀이 우리집에도 설치가 되었습니다.  이 첨단 도시에서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원시림 숲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숲과 도시와 바다와 강과 호수와 스키장이 공존하는 도시에 사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게 밴쿠버에 사는 맛입니다. 그리고 미국에는 없는, 캐나다에는 동네마다 있는, 시에서 운영하는,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고오급 수영장에 가서 푸카푸카 수영도 할 수 있고, 사우나도 할 수 있으니 캐나다 생활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캐나다인이면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첨단 장치 설치를 마치고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3월에 뒷산에 눈이 많이 내려 계곡마다 수량이 풍부합니다. 겨울에 산란한 연어 새끼들이 개울에서 큰 다음에 바다로 긴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뒷산 봉우리에는 아직도 눈이 하얗게 보이지만, 동네에는 온갖 봄에 피는 꽃들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마치 눈 속에서 피어난다는 에델바이스같이 온갖 꽃들이 정말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 꽃들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당연히 주님의 정말 대단한 솜씨입니다. 정말 섬세하고, 정말 우아하게 잘 만드셨습니다. 누구 보라고 이렇게도 다양한 꽃들을 창조하셨을까요? 원숭이 보라고? 까마귀 보라고? 사람들 보라고 이 꽃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요? 이 꽃들을 보면서 그 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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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소설 “죄와 벌”을 통해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대작을 남겼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한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사랑을 외치는 주님이 사람들에게 왜 시련을 주고, 죽이고, 심지어는 홍수로 쓸어버릴 수 있나?”    교인뿐만이 아니고 기독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신이 되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시각을 자신의 시각으로 자신을 위하는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아서 그런 좁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을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시각에서 판단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깨우칠 것을 깨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적인 사건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일어난 것입니다. 창조주가 인간에게 준 신의 법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그리고 그 죄가 감당하게 될 처벌과 재앙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극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심지어는 죄를 범한 인간에게까지도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시선을 재앙에만 두고, 죄에 두지 않으면 성경과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약 열왕기하 6장 24절에 보면 아람 군대에 포위된 사마리아 성내의 백성들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 묘사됩니다. 아람 군대에 포위되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크게 굶주려 아이를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며, “잔인함”만을 생각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모습을 창조주의 잔인함으로만 본다면 죄악...

나의 블레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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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블레셋 성경의 구약을 읽다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악연은 참으로 긴 시간을 두고 이어집니다. 심지어는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는 이름이 블레셋(Philistine)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그 옛날의 악연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블레셋 사람들과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있는 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블레셋이 지금의 팔레스타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름 돋는 일입니다. 한번의 악연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면 정말 피차 피곤 할 것 같습니다. 내 인생에는 나와 악연이 이어지고 있는 나의 블레셋이 없을까요? 내 삶의 앞길을 끊임없이 가로막는 것들, 끊임없이 앞에 나타나는 장애물들과 걱정 근심, 모든 사람에게 자기 나름의 블레셋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내 인생이 남의 인생의 블레셋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블레셋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아브라함 시절부터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등살에 쫓겨 우물을 계속 빼앗기며 새로운 우물을 찾아나섰던 이삭의 우물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심지어는 이삭같이 당하면서도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자세라는 표상이 되기도 합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우물을 빼았겨도 새 우물을 찾아 떠나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나날이 창대해지고 강성해지는 이삭을 보면서 겁을 먹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군대장관까지 끌고 와서는 이삭에게 화친을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26: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Ge 26:29, NIV] that you will do us no harm, just as we did not harm you but always treated you well and...

과부의 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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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헌금 미국 공무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목이 팍팍 잘려나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됩니까? 트럼프가 미친 놈 하나를 연방 정부 효율부 장관 자리에 앉혀놓으니 이 놈이 미국 정부 예산을 절감한답시고 하는 일이 공무원 일자리 박탈하는 일입니다. 돈 많고 돈 잘 버는 놈 데려다 놓으면 정부를 위해서도 돈 많이 남겨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모양인데, 돈 버는 것과 예산 절감하는 일이 프로세스가 같은 일인가요? 그 동안 중국에 던져주고 미국내에서는 무너져 내린 제조업 구조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자국민의 복지도 고려한 정책을 수립해야지 단지 몇 개월 시한부 자리를 마련해주고 국가 예산 1조 달러 이상을 절감하려고 하니, 그 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람 자르는 일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미국이 민주국가입니까? 민주,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평균 임금의 중산층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가난한 사람들, 아닙니다. 돈 위주로 돌아가는 미국 사회를 보니, 미국의 국민은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고, 그 외는 그들이 부려먹고, 수탈하는 노예같은 대상일 뿐입니다. 없는 놈의 간까지 긁어 모으는, 벼룩이 간을 빼먹는 부자들이 주인인 나라가 미국입니다.  그럼 한국의 국민은 누구입니까?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 민초들입니까? 마이클 존스턴 교수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국의 부패 유형은 매우 흥미롭다.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다. 많은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 먹는다.” 한국이 그렇다고 이야기하지만 미국도 매 한가지입니다. 다를 것이 없습니다. 뭐 말이 민주주의지, 그 옛날 봉건 영주가, 왕들이 민초들을 등쳐 먹는 것이나, 현재의 미국이나 한국의 권력이 자기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을 등쳐 먹는 것이 다른 것이 하나 없습니다. 유사 이래 사람은 그런 짓을 반복하며 살았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죄스럽고, 욕심이 과하여 인간 중심으로 돌...

금수저 솔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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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솔로몬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솔로몬의 이야기는 대충 이런 것입니다. 솔로몬은 부자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로 인해 지혜는 물론이고, 부와 영화까지 얻었다. 주님의 일을 위하여 주님께 구하는 자는 무엇이든 얻는 은혜를 받을 것이다 뭐 그런 판에 박힌 소리입니다. 성경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하나도 위안이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솔로몬은 태어나자마자 뭐 한 일도 없는데,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하십니다. 완전 금수저입니다. 자기도 금수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좋아할 스토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삼하12:24-25]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2Sa 12:24-25, NIV] 24 Then David comforted his wife Bathsheba, and he went to her and made love to her. She gave birth to a son, and they named him Solomon. The LORD loved him; 25 and because the LORD loved him, he sent word through Nathan the prophet to name him Jedidiah. 뭐 토기가 어떻게 생겼건 그건 토기장이 마음입니다. 마음에 안들면 만든 토기를 박살 내버리는 것도 토기장이 마음이니, 흙으로 만들어진 토기는 불만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흙으로 만들어졌고,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도 토기와 마찬가지로 박살나도 뭐라 반박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건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렘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Jer 18:4, NIV] But the p...

한국 교회 진단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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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진단 리포트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자기를 먼저 알아야 뭘 하려고 해도 방향을 잡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를 모르는데 무슨 아이디어가 생길 수 없습니다. 개인도 그런데, 교회가 어떻게 되길 원하면 지금 이 교회, 내 교회가 어떤 상태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무슨 잣대를 가지고, 어떤 저울을 가지고 내 교회의 길이를 재어보든지, 무게를 달아보든지, 양을 측정해보든지 할 수 있을까? 아래 동영상을 보니 방법이 있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 블로그 홈페이지를 열면 블로그의 모든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노트북이나 PC에서 보실 경우, 글의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 글이 열립니다. https://vancouver-story.blogspot.com   https://www.youtube.com/@vancouver-story

범인(凡人)과 천재의 수준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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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凡人)과 천재의 수준 차이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천재와 범인(凡人) 사이의 재능차이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평생 시기한 살리에리의 이야기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평범한 작곡가와 천재 작곡가의 차이가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모짜르트의 천재성과 음악성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면 살리에리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고 음악적 소양과 눈썰미가 뛰어난 편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다만 창작 능력과 감각과 아이디어가 모짜르트만큼 되지 못했다는 것이지 그도 역시 당대에 활약한 음악가인 점은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과학이 발전하고 K-Pop이 세상을 휩쓰는 요즘까지도 모짜르트를 능가하는 클래식 음악이 생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살리에리만 평범한 음악가였다고 단언한 수도 없는 일입니다. 모짜르트의 음악과 그가 작곡한 악보만 보고도 대작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살리에리 역시 나름 뛰어난 음악가였습니다. 다만 영화에서 정말 꼴불견은 모짜르트의 음악을 듣고 연주회가 끝난 다음, 음악이 어땠냐고 묻는 말에 왕이 잠시 주저하다가, “노트가 좀 많았다.”고 코멘트를 다는 말은 코미디였고, 꼴불견이었습니다. 그 호사스런 연주회를 참 많이도 보았을 왕이 음악에 다는 코멘트 치고는 너무나 형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현대에서도 가장 완벽한 음악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모짜르트의 음악에 노트가 좀 많았다니? 아마도 그냥 훌륭했다고 코멘트를 달았다면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표시가 날까봐 그랬을까요? 그 코멘트로 인해 왕은 후대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남을 칭찬할 줄 모르는, 인격도 잃었고, 음악적 소양이 형편없다는 것도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살리에리만 모짜르트의 음악이 완벽한 음악이라는 것을 속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질투심을 꾹꾹 눌러담고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사실에 얼마나 근접한 것인지, 아니면 왕같은 귀족 그룹에 대한 ...

번뇌와 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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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와 번민 한국사람에게 백팔번뇌(百八煩惱)는 익숙한 말입니다. 한국에 불교문화가 오래전부터 있었기 때문입니다. 번뇌, 이것 사람 피를 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근심이 많은 것이 번뇌입니다. 번뇌라는 말이 불교에서만 쓰이는 용어가 아니라, 성경을 찾아보아도 번뇌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어의 번뇌가 불교가 이야기하는 번뇌가 그 어원의 의미가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교문화권인 한국에서 한국어 성경으로 해석이 되다보니, 번뇌란 말이 쓰여졌을 것으로 봅니다. 성경에서 번뇌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사무엘과 모르드개가 나오는 에스더서에서 번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잠언과 전도서에도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삼상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1Sa 16:14, NIV] Now the Spirit of the LORD had departed from Saul, and an evil spirit from the LORD tormented him. 그런데 번뇌말고 번민(煩悶)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번민의 “민”자 한자는 문밑에 마음이 있는 모양새입니다. 문지방에서 들어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혹은 나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뭐 그런 걸 고민하는 모습인가요? 아니면 마음이 문 안에 갇혀있는 모양새인가요? 문만 걷어차고 나가면 뭔가 해결될 수 있기도 한 모양입니다. 한글 성경은 번민이라는 단어도 품고 있습니다. 번민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성경의 인물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서에 번민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에서도 번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창41:8]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Ge 41:8, NIV] In the morning his mind was troubled, so he sent for all the magician...

Living Hope 예수 나의 참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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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 Hope 예수 나의 참 소망 ‘다다다딴딴’ 아주 단순한 기본 멜로디에 실린 찬양이 참 아름다운 곡입니다. 가사도 참 복음적이고요. 그런데 이 찬양이 영어 버전이 더 듣기 좋은 경우가 있습니다. 영어보다 한국말이 더 친숙한 한국인에게 말입니다. 성량이 극히 대단한 것도 아닌데, 보컬이 정말 괴물입니다. 잘 부릅니다. It's a beautiful hymn with a very simple basic melody of "Da-da-da-Tan-Tan". The lyrics are very gospel-like, but there are times when the English version of this song sounds better. For Koreans, who are more familiar with Korean than English. And it's not like she's an extreme vocalist, she's a monster. She sings very well. 제 블로그 홈페이지를 열면 블로그의 모든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노트북이나 PC에서 보실 경우, 글의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 글이 열립니다. https://vancouver-story.blogspot.com   https://www.youtube.com/@vancouver-story

자랑이 왜 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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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이 왜 죄냐? “사랑”의 “사”자(字)에 “ㅡ”를 씌우면 “자”(字)가 됩니다. 한자에서 “ㅡ”, 이 수평획은 땅을 의미합니다. 즉, 사랑에 땅자랑이 씌워지면 자랑이 됩니다. (주: 이건 어디 두꺼운 책에 나오는 썰은 아니고 그냥 저의 실없는 개그인 점을 양해 바랍니다.) 사랑은 주님께 사랑받을 일이지만, 믿는 사람이 땅자랑을 하면 벌 받을 일입니다. 그건 사랑도 아니고요. 땅자랑, 그게 뭡니까? 땅 있는 사람이 땅 없는 사람에게 땅자랑하면 그게 뭡니까? 지주가 소작농에게 땅자랑하면 그건 갑질입니다. 사람 죽이는 일입니다. 땅자랑, 그건 요즘 말로는 “돈”자랑이 됩니다. 입만 떼면 돈자랑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습관입니다.  같이 다니는 사람이 쉼없이 입만 열면 돈자랑하고 있으면 정말 하루종일 심신이 피곤해집니다. 오래 전에 믿지 않는 사람 집에 들려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일이 있습니다. 몇 집이 모였는데, 저희 빼고는 모두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날 저녁 먹으면서 그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정말 죄다 물질적인 이야기뿐이었습니다. 누구 집에 가니까 장롱이 의리의리하다에서부터 시작하여, 누구네는 정말 잘 살더라 뭐 시종일관 그런 이야기뿐입니다. 심지어는 정말 이해할 수 없고, 골 때리는 이야기는 남이 잘 사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남이 잘 사는 이야기를 하면 자기도 있어 보여서 그런 건가요? 세속적인 자랑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심히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게 사람의 정신을 그렇게 피폐케하는 일이라면 성경은 자랑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고 있을까요?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Co 13:4, NIV]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does not envy, it does not boast, it is not proud. 성경 말씀은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하...

좋은 찬양 부르는 발성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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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찬양 부르는 발성법 악기들이 소리 내는 법, 현악기는 선의 떨림이 공기를 흔들고 그것이 귀의 고막을 공기가 전해주는 주파수 그대로 두들겨 우리가 소리를 감지합니다. 그리고 그 주파수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아름답게 들려주는 최적의 음을 찾아 만들고 작곡한 것이 현재의 악기고 음악입니다. 피아노도 건반을 두들기면 그것이 피아노 안에 깔아놓은 현을 두들겨 그것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그 주파수가 공기를 통해 전해져 우리 귀에 전해집니다. 그에 반해 관악기는 악기 연주자가 공기를 악기에 불어넣고 그 공기의 흐름을 제어하여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는 보컬도 따지자면 관악기의 한 종류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좋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려면, 좋은 보컬을 내려면 그 기본은 그 악기에 불어넣는 공기가 우선 충분해야 합니다. 즉, 목에 힘 꽉주고 악을 쓰며 소리를 내려고 하지 말고, 대신 목에 준 힘을 빼고,  성대를 충분히 울릴만큼의 숨을 내쉬어 주어야 합니다. 그 숨의 힘, 공기의 힘으로 목청을 연주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개념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면 힘들이지 않고 충분한 소리를 낼 수 있고, 소위 말하는 두성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발성은 호흡이 전부다라고 하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공기반, 소리반이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유행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런 허접한 유행가를 부를 때도 그렇게 공기반 소리반으로 노래를 해야 들을만 합니다. 그렇게 발성법의 비밀을 깨달은 다음에 찬양을 부르면 얼마나 신나고 은혜가 되는지 모를 일입니다.  요즘 예람워십 듣는 재미에 빠져 있는데, 유튜브로 그걸 듣다보면 연관 동영상들이 주변으로 뜹니다. 그런 것들을 듣다가 정말 보컬이 단단하고, 고음과 격정적인 부분에서 과하지 않고, 세련된 매너로 찬양을 하는 동영상을 하나 발견하여 소개합니다. 아래 그림은 예람워십의 한 찬양모습입니다. 제 블로그 홈페이지를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