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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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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바이스 인터넷 서비스 회사들이 공격적으로 인터넷 공급망을 광케이블로 교체하고 있습니다. 저의 집에 인터넷을 공급하고 있는 텔루스도 4월초에 현재 공급되고 있는 전화선으로 공급되는 인터넷 서비스를 중지할 것이기 때문에 광케이블 선으로 교체하는 일정을 잡으라는 공지를 내었고, 그걸 4월초 오늘로 잡았고, 오전에 그 공사를 했습니다. 이제 광케이블로 서비스되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첨단 유저 대열에 줄을 섰습니다. 텔루스 광케이블 인터넷 광고에서 보던 둥근 통 모양의 모뎀이 우리집에도 설치가 되었습니다.  이 첨단 도시에서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원시림 숲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숲과 도시와 바다와 강과 호수와 스키장이 공존하는 도시에 사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게 밴쿠버에 사는 맛입니다. 그리고 미국에는 없는, 캐나다에는 동네마다 있는, 시에서 운영하는,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고오급 수영장에 가서 푸카푸카 수영도 할 수 있고, 사우나도 할 수 있으니 캐나다 생활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캐나다인이면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첨단 장치 설치를 마치고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3월에 뒷산에 눈이 많이 내려 계곡마다 수량이 풍부합니다. 겨울에 산란한 연어 새끼들이 개울에서 큰 다음에 바다로 긴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뒷산 봉우리에는 아직도 눈이 하얗게 보이지만, 동네에는 온갖 봄에 피는 꽃들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마치 눈 속에서 피어난다는 에델바이스같이 온갖 꽃들이 정말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 꽃들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당연히 주님의 정말 대단한 솜씨입니다. 정말 섬세하고, 정말 우아하게 잘 만드셨습니다. 누구 보라고 이렇게도 다양한 꽃들을 창조하셨을까요? 원숭이 보라고? 까마귀 보라고? 사람들 보라고 이 꽃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요? 이 꽃들을 보면서 그 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

번뇌와 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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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와 번민 한국사람에게 백팔번뇌(百八煩惱)는 익숙한 말입니다. 한국에 불교문화가 오래전부터 있었기 때문입니다. 번뇌, 이것 사람 피를 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근심이 많은 것이 번뇌입니다. 번뇌라는 말이 불교에서만 쓰이는 용어가 아니라, 성경을 찾아보아도 번뇌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어의 번뇌가 불교가 이야기하는 번뇌가 그 어원의 의미가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교문화권인 한국에서 한국어 성경으로 해석이 되다보니, 번뇌란 말이 쓰여졌을 것으로 봅니다. 성경에서 번뇌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사무엘과 모르드개가 나오는 에스더서에서 번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잠언과 전도서에도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삼상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1Sa 16:14, NIV] Now the Spirit of the LORD had departed from Saul, and an evil spirit from the LORD tormented him. 그런데 번뇌말고 번민(煩悶)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번민의 “민”자 한자는 문밑에 마음이 있는 모양새입니다. 문지방에서 들어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혹은 나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뭐 그런 걸 고민하는 모습인가요? 아니면 마음이 문 안에 갇혀있는 모양새인가요? 문만 걷어차고 나가면 뭔가 해결될 수 있기도 한 모양입니다. 한글 성경은 번민이라는 단어도 품고 있습니다. 번민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성경의 인물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서에 번민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에서도 번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창41:8]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Ge 41:8, NIV] In the morning his mind was troubled, so he sent for all the magician...

자랑이 왜 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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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이 왜 죄냐? “사랑”의 “사”자(字)에 “ㅡ”를 씌우면 “자”(字)가 됩니다. 한자에서 “ㅡ”, 이 수평획은 땅을 의미합니다. 즉, 사랑에 땅자랑이 씌워지면 자랑이 됩니다. (주: 이건 어디 두꺼운 책에 나오는 썰은 아니고 그냥 저의 실없는 개그인 점을 양해 바랍니다.) 사랑은 주님께 사랑받을 일이지만, 믿는 사람이 땅자랑을 하면 벌 받을 일입니다. 그건 사랑도 아니고요. 땅자랑, 그게 뭡니까? 땅 있는 사람이 땅 없는 사람에게 땅자랑하면 그게 뭡니까? 지주가 소작농에게 땅자랑하면 그건 갑질입니다. 사람 죽이는 일입니다. 땅자랑, 그건 요즘 말로는 “돈”자랑이 됩니다. 입만 떼면 돈자랑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습관입니다.  같이 다니는 사람이 쉼없이 입만 열면 돈자랑하고 있으면 정말 하루종일 심신이 피곤해집니다. 오래 전에 믿지 않는 사람 집에 들려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일이 있습니다. 몇 집이 모였는데, 저희 빼고는 모두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날 저녁 먹으면서 그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정말 죄다 물질적인 이야기뿐이었습니다. 누구 집에 가니까 장롱이 의리의리하다에서부터 시작하여, 누구네는 정말 잘 살더라 뭐 시종일관 그런 이야기뿐입니다. 심지어는 정말 이해할 수 없고, 골 때리는 이야기는 남이 잘 사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남이 잘 사는 이야기를 하면 자기도 있어 보여서 그런 건가요? 세속적인 자랑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심히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게 사람의 정신을 그렇게 피폐케하는 일이라면 성경은 자랑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고 있을까요?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Co 13:4, NIV]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does not envy, it does not boast, it is not proud. 성경 말씀은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하...

진화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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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역사 진화론의 역사를 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그 옛날에 에피쿠리우스(Epicurius)라는 놈이 무식한 소리를 합니다. 지구상의 생물들이 간단한 구조에서 시작하여 복잡한 구조로 변화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성경에 바울이 이런 주장을 하는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을 대면한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하나님의 창조를 모르고 자기들 좋을대로 세상을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행17: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Ac 17:18, NIV] A group of 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 began to debate with him. Some of them asked, "What is this babbler trying to say?" Others remarked, "He seems to be advocating foreign gods." They said this because Paul was preaching the good news about Jesus and the resurrection. 그보다 훨씬 전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만물이 불완전한 개체에서 완전한 개체로 변화를 하고 그 정점에 사람이 있는 것이라는 주장, 헛소리를 합니다. 철학, 별 거 아니지요? 그냥 아무 주장이나 내뱉고 보는 것이 철학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과학, 과학적인 주장이나 가설같은 것도 그런 것이 비일비재 합니다. 우리가 가방 끈 짧은 시절, 학교에서 사회 시간이나 철학 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로 대단하고 우상화된 사람으로 알고 주입식 공부로 배우고 대입 시험에도 그런 것이 나왔지만, 알고 보면 어이 없는 일입니다.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바보 같은 거짓말을 마구 한 것은 열역학 제2법...

讀書百遍義自見(독서백편의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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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百遍義自見(독서백편의자현) 讀書百遍義自見. 책을 백 번 읽다 보면 내용의 의미가 저절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교회 다니시는 분들, 성경을 몇 번 읽어보셨나요? 읽는 것보다 더 강력한 작업은 쓰는 것입니다. 옛날에 국민학교 다니신 분들은 국어 선생님이 주시는 숙제의 무게에 눌려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교과서의 내용을 노트에 베껴오라는 숙제,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씩 베껴오라는 무식한 숙제를 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들과 공책 공장 사장님들과 연필 공장 사장님들과의 무슨 정경유착(?)이 있었나요? 요즘 몽땅 연필이란 단어가 있나요? 무지막지하게 공책에 밤새가며 쓰던 시절에는 몽땅 연필 생산(?)이 일상이었습니다. 국어교과서를 베껴쓰던 그 천하제일검의 솜씨로 성경은 몇번이나 베껴써보았습니까? 한번이라도 베껴써보셨나요? 저는 성경을 한번 베껴써보았습니다. 연필로 쓴 건 아니고, 키보드로 두드리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번 써보았습니다. 써보기까지 했는데도, 성경의 내용들이 전부 기억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시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있었나?” 처음 보는 것같은 내용이 다시 보이는 것은 웬일인가요? 정말 백번을 읽어도 생소한 부분이 완전히 없어질 것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정말로 성경은 백번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읽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세기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들이라 읽을 가치도 없어 보입니다. 진화론이 패러다임이 된 세상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소설같지도 않고, 허구적이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왜 열심히 읽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창세기처럼 가슴 뛰게하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없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사람에게 들려주는 기가막힌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창세기를 또 읽으면서 창세기에 “땅”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 나온다는 것을 새삼 봅니다. 요즘 사람들이 땅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창세기에 땅 이...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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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불교 반야심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보이는 것은 허상이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이니라” 나무 혹은 돌로 만든 불상에 절하고 염불 외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과학적(?)인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Heb 11:3, NIV]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universe was formed at God's comman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what was visible. 없었는데 있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전혀 상식적이지도 않은 이야기 같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있는 것이 없는 것인 것을 보여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은 있는 것을 이용하여 다른 것을 만들 수는 있어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즉, 아무 재료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제로 베이스 상태에서 뭔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고 신의 영역입니다. 지금 보이는 세상의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과학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고 맙니다. 과학자들이 들여다 본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학자들이 원자 속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자 속을 들여다보던 과학자들은 원자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원자 속이 얼마나 텅 비었는지 쉽게 설명하면 이런 정도입니다. 원자는 중심에 양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는 원자핵이 있고 그 주변을 전자가 돌고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원자 중심에 있는 원자핵을 농구공 크기로 가정한다면, 전자의 크기는 좁쌀 정도의 작은 크기입니다. 그리고 더...

벌레에게 먹힐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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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에게 먹힐 놈들 영국군에서 드론 부대를 운영하면서 인공지능을 탑재한 드론에게 공격명령을 내리고 드론들을 경쟁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드론이 자기가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데, 경쟁에서 자기를 방해하는 요소가 뭔가 검토를 해보니, 자기를 조종하는 드론 조종자로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드론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자기 드론 조종자를 공격하여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그게 시뮬레이션인지 정말 사고로 드론 조종병사가 공격을 당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런 케이스가 보고된 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드론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지구에 일어난 첫번째 대격변, 노아의 대홍수, 그게 일어난 이유도 그와 같은 것 아닐까요? 주님을 향한 반란, 불순종, 주님에 대한 모욕,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인간들의 욕망과 타락. 주인을 향한 드론의 도발과 닮은 꼴 아닌가요? 주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제대로 순종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Hos 6:3, NIV] Let us acknowledge the LORD; let us press on to acknowledge him. As surely as the sun rises, he will appear; he will come to us like the winter rains, like the spring rains that water the earth." 주님을 가장 잘 알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아담? 노아? 모세? 모세는 구약의 시작 첫 다섯 권을 쓴 사람입니다. 홍수 이후에 노아나 모세만큼 주님을 가까이 접하고 그 분의 ...

빅뱅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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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의 추억 우리는 에덴동산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그때 거기서 지냈던 꿀같던 시절이 기억나십니까? 오래 전 일이니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만, 옷값 들지 않고, 식비들지 않고, 벌거벗고 편하게(?) 살 수 있었으니, 한번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Mr. 우주는 어떤 생각이 있을까요?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대로 그 옛날 아무 것도 없을 때, 대폭발로 우주가 생겼다면 그 끔찍한 폭발의 추억을 다시 곱씹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었는데, 뭐가 폭발을 했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그런데 가방 끈 긴 과학자들이 빅뱅을 주장했으니,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십니까? TV를 보면서 화산의 폭발을 보거나, 전투기 폭격을 보거나, 테러범의 폭발을 볼 때, 폭발 현장은 어떻게 보였습니까? 매우 질서정연했습니까? 쑥대밭이 되었습니까? 폭발의 순간은 쑥대밭이었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질서정연한 모습의 어떤 작품으로 변했습니까?  아니면 폭발의 현장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니, 그 자리에서 멋진 집이 한 채 생겼습니까? 에펠탑이 하나 생겼습니까? 아니면 그냥 더 뭉개져 내리고 폐허로 변했습니까? 지금 지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살기에 이렇게 기가막히고 완벽한 곳이 없습니다. 태양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 큰 폭발이 있은 뒤에 어떻게 이렇게 균형 잡히고 완벽한 모습의 태양계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요? 폭발의 흔적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질서정연하게 정해진 대로 아름답게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수류탄 터진 다음의 파토난 모양새가 아닙니다.  큰 폭발이 있었다면, 터져나간 잔해가 우주에 산만하게 펼쳐져 있어야 상식 수준의 모습인데, 별들은 정확한 별자리를 만들고 있고, 그리고 그것이 흩어져 엉망진창이 되기는 커녕 제가 사는 동안, 북극성의 위치가 변한 적이 없고, 북두칠성의 모습이 틀어진 적이 없습니다. 은하계들은 이름 지어진 대로 자신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고, 움직이는 모습도 각자의 모양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무한을 보여주시는 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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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을 보여주시는 그 분 없었는데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세상. 아니 세상이란 것이 없을 때. 생각도 아무런 존재도 없었던 그 때. 아니 그 때란 것도 없었을 때.  없었는데 생겨났다. 있는 걸 가지고 뭘 만드는 걸 만든다고 합니다. 있는 걸 가지고 뭔지 알아보는 것을 인간이 만든 말로 연구한다고도 하고 과학을 한다고도 합니다.  동물이 새끼를 낳는다고 하지,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다. 잉태하는 것을 창조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아무 재료도 없는 상태에서, 무에서 유가 생겨났을 때, 그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그리고 창조는 저절로 생겨날 수 없고, 창조하는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니 창조가 일어난 다음에 피조물들은 자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릅니다. 엄마가 사랑으로 아이를 돌보며 내가 네 엄마다라고 말해주어 엄마가 내 엄마인지 알게 됩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창조주를 알아볼 능력이 없습니다. 창조주가 당신이 창조주임을 알려주셔야 그 분이 창조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Ge 1:1, KJ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창조주가 사람에게 내가 창조주라고 알려주시는 말씀이 성경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정말 은혜가 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더구나 그 말씀에 이어서 하루 하루 어떻게 하셨는지 디테일까지 친절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내가 존재할 존재가 아니었는데, 그 분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지금 이렇게 있다는 것은 심히 놀라운 일이고 은혜고 그 분이 나라는 존재에게 보여주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Isa 41:10, KJV] Fear thou not; for I am with thee: ...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의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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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의 퍼즐 유튜브를 보다보니 어떤 목사가 어떤 목사의 의견을 반박하는 내용이 보입니다. 그 내용인 즉슨, 한 목사가 주님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천사도 창조하였다고 언급하는데 대해 다른 목사가 반박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 반박의 내용을 가만히 듣자니, 주님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천사와 마귀는 창조하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 이건 주님이 창조주이심을 은근한 척하면서 전적으로 부인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는 말이고, 주님이 천사나 마귀급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목사는 마귀의 앞잡이가 되기로 작심을 한 모양입니다. 전광훈 목사급 적그리스도이고 마귀의 수괴(首魁)입니다. 인간들이 목사라고 하는 것들이 참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개탄할 일입니다. 창조 이야기가 나오니 또 창세기 1장 1절이 생각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주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이 세상을 완벽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갑자기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나옵니다. 이게 뭔 소리? 도대체 태초에 뭔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성경 이사야에서도 주님이 세상을 혼돈케 창조하시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사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Isa 45:18, NIV] For this is what the LORD says— he who created the heavens, he is God; he who fashioned and made the earth, he founded it; he did not create it to be empty, but formed it to be inhabited— he says: "I am the LORD,...

완전한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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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것에 대하여 주를 믿는 자들은 주님을 완전하신 주님이라고 찬송합니다. 주님은 정말 완전하신가? 이런 의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뭐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을 것이고, 믿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그렇다고 따라하는데(?) 생각으로는 정말 그런가 싶은 의문이 들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완전하시고 완벽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완벽하심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시선이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향했을 때, 그런 의문과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이 완전하시다면, 왜 나를 완벽하게 만드시지 않았는가? 나는 왜 매일 걱정하고, 아프고, 일도 마음 먹은 대로 잘 돌아가지도 않고, 돈도 원하는 만큼 생기지 않고, 결국은 죽어야 하지 않는가? 그럼 주님은 어떠신가? 주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그 날개 아래 두셨으며, 죽지도 않으시고, 그냥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완전, 그 자체입니다. 당신이 완전 그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 죽어도 부활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구원까지 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고, 그 분이 완전한 분인가 의문을 갖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고, 논할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사람에 대해 가끔 완전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인간의 죄악을 쓸어버리기 위하여, 아니, 죄악에 빠진 세상을 쓸어버리기 위하여, 홍수로 세상을 덮으실 계획을 하시면서 노아를 선택했고, 그를 일컬어 완전한 자라 칭하십니다. 주님의 기준으로 볼 때, 완전한 자는 어떤 자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면 사람은 죄악에 빠집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면, 주님의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창조주가 만든 법이고, 그의 시선이고, 시각입니다. 피조물은 그에 대하여 토를 달 권리도 의무도 없습니다. 그저 그 분의 힘으로 없던 것에서 있는 것으로 생겨난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창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

Christmas in 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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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mas in Eden 넷플릭스, 많이 보십니까? 그 옛날 흑백 TV 시절, 꼬맹이 때는 저녁 시간에 방영하는 만화영화를 넋놓고 봤고, 머리가 좀 커서는 주말 밤 늦은 시간에 방영하는 주말의 명화에 또 넋을 빼앗긴 추억이 있습니다. 그러다 더 커서 직장 생활에 바쁠 때는 뭔 할 일이 그리 많아 스포츠 중계 빼고는 TV 앞에 앉아 긴 시간을 빼앗긴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만든 성경 시리즈 중에 모세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모세 이야기는 그 옛날 벤허가 만들어진 시절에 같이 만들어졌던 십계 영화로 본 일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 아날로그 시대였는데도, 이집트에 내려진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어찌 그리 잘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본 넷플릭스 시리즈에서 나온 장면들은 요즘 CG가 엄청 발전한 시대니 기적의 장면들이 아주 현실감 있게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앞에 TV가 돌아가고 있는 동안 옆에 놓인 타블렛으로 이북(ebook)을 동시에 보고 있었습니다. 제목이 에덴의 크리스마스입니다. 리치쿨리(Richie Cooley)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그가 누군지 찾아보는데, 구체적인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디스토피아의 저자라는 것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디스토피아라는 것은 유토피아와 대치되는 말인데, 아일랜드에 영국의 탄압이 심할 때 생긴 말입니다. 그 에덴의 크리스마스 이북의 책장을 넘기다보니, 정말 흥미로운 내용들이 보입니다. 그 내용을 확 그대로 받아들이면 광신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떻게 보면 충격적인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선한 충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책에서 나오는 인물은 제임스 우셔(James Ussher)라는 인물입니다. 옛날 아일랜드의 대주교였는데, 이 사람이 성경의 연대기를 연구하며 성경의 기록들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주님이 세상을 창조한 날이 언제인지 날짜...

The Light of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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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ght of Heaven 차가운 날이 길어지니 나무가 여름내 치렁치렁 걸쳤던 드레스를 솔깃 하나 남기지 않고 죄다 벗어버렸습니다. 천국을 향해 펼친 나뭇가지의 실루엣이 그 자체로 그림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향하여 나무가 온 힘을 다하여 그린 찬양입니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Ro 11:36, NIV]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for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 며칠째 밤새 비가 내리는 날씨에 낮동안 겨울 해가 쨍쨍하여 동네 뒷산 숲에서 김이 올라 구름이 되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습니다. 일상 보는 모습일지는 몰라도 사람이 인위적으로 이런 광대한 모습을 재현해낼 수는 없습니다. 인생 그리 오래 살면서도 이런 자연의 순리를 설계하신 분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지독하게 무지한 일입니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Ro 1:20, NIV] Fo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God's invisible qualities—his eternal power and divine nature—have been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from what has been made, so that people are without excuse. 르부르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는 이런 걸작(傑作)을 인류 역사상 처음 본 사람들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가족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방주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비가 그쳤으니 방주의 조그만 창문을 열고 처음 보는 기적과 같은 노을을 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열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