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 2024의 게시물 표시

호슈베이의 한인 가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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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슈베이의 한인 가게들 웨스트 밴쿠버의 서쪽 끝, 바다입니다. 거기서 더 가고 싶으면 페리를 타야 합니다. 웨스트 밴쿠버의 서쪽 끝 땅끝 마을, 호슈베이입니다. 베이의 모양이 큰 배 대기 좋게 말굽 모양으로 생겼다고 동네 이름이 그리 지어졌나봅니다. 거기서 배를 타면 밴쿠버 아일랜드로 갈 수 있습니다. 밴쿠버 아일랜드는 남한의 삼분의 일 정도 크기의 큰 섬이고,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주도인 빅토리아가 있습니다. 빅토리아는 밴쿠버 섬의 남단에 있고, 위쪽으로 큰 도시로는 나나이모와 코목스같은 도시들이 있고, 고속도로로 이어져 있습니다. 섬에 고속도로가 있으니 섬이라고 하기에 좀 머쓱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밴쿠버는 오월부터 시월까지 휴가철입니다. 목숨 걸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캐나다 각지에서 또 유럽 각지에서, 세계 각지에서 밴쿠버를 즐기기 위해 놀러옵니다. 밴쿠버와 휘슬러까지 둘러본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 밴쿠버 아일랜드입니다. 거기를 가기 위해서 페리를 타는 항구가 밴쿠버에 둘 있는데, 하나는 빅토리아로 바로 갈 수 있는 트와센이 있고, 나나이모로 연결되는 호슈베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호슈베이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은 밴쿠버 아일랜드의 나나이모에 떨어집니다. 나나이모에서 빅토리아로 내려가려면 차로 2시간 정도 잡아야 합니다. 밴쿠버 아일랜드는 그 크기가 남한의 삼분의 일이 되는 만큼 다 구경하려면 평생 둘러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대도시 몇 빼고는 나머지 대부분의 땅이 원시림이고 또 큰 섬 주변에 경치 좋은 작은 섬들이 즐비하여 정말 그걸 다 보려고 하면 보트도 있어야 하고, 배낭 메고 목숨 걸고 탐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기기에는 천혜의 요새(?)이고 정말로 그런 미친(?) 사람들이 트레킹을 즐기기 위해 몰려드는 곳입니다. 그리고 매년 조난 사건과 구조 활동이 벌어지기도 하는 그런 별천지입니다. 다시 호슈베이 이야기로 돌아와서, 호슈베이는 웨스트 밴쿠버에 속하는 작은 항구도시지만, 여름철이면 섬으로 가려는 차들과 여

노아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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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의 방주 [사43:7, 우리말성경] 그들은 내 피붙이들, 내가 내 명예를 걸고 창조하고 만들고 지은 내 백성이다' 하고 말하겠다."

무화과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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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필 무렵 8월말, 며칠째 흐리고 간간이 비가 뿌리는 그레이(grey)한 날씨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전형적인 밴쿠버의 겨울 날씨 같습니다. 밴쿠버가 원래는 겨우내 비가 내려도 여름이면 햇볕 쨍쨍 죽이는 날씨 때문에 밴쿠버의 여름은 그야말로 관광천국 놀다 죽을 것같은 곳인데, 올 여름은 완전히 아닙니다. 밴쿠버 놀러오려면 절대 겨울에는 오지 말고, 여름에 오라고 이야기하는데, 이제는 여름에 와도 되는 건지 장담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밤새 비가 뿌렸는지 땅이 젖어있습니다. 바닷가로 아침 산책을 나섰습니다.  봄부터 날씨가 좋지 않아 일사량이 많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웬일로 무화과 나무에는 열매가 빼곡히 열려 있습니다. 블루헤론(blue heron)이 먹이를 노리다 기회를 포착하고 잽싸게 움직입니다. 뭔가 잡았습니다. 부리에 smelt(스멜트)가 하나 물려 있습니다. 8월은 스멜트들이 이곳 앰블사이드 비치에 산란하는 시기입니다. 손가락만한 스멜트가 많은 곳이라 seal(물개), otter(수달), cormorant(가마우지)들의 밥상이 되는 곳입니다. 물속이라 볼 수 없어서 그렇지 연어들에게도 중요한 먹이가 될 것입니다. 스멜트 금어기가 끝나면 그물을 걸어 스멜트를 잡는 사람들을 엠블 사이드에서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스멜트, 대짜 멸치보다 조금 더 크고 herring(허링)보다는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는데, 기름기가 많아 튀겨 먹으면 정말 고소합니다. 한국의 강에서 빙어를 잡아 튀겨먹는 맛 같은 것.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블루헤론은 집이 스탠리파크 테니스코트 옆 높은 나무에 있습니다. 거기 가면 나무 위에 지어진 대형 블루헤론 둥지를 볼 수 있고, 산란기에는 거기에 떼로 모여 새끼를 키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냥은 곳곳에서 취향대로 하지만 웨스트 밴쿠버 해안을 선호하는 놈 몇마리가 있습니다. 흐리고 꿀꿀한 날, 브런치로 돼지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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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툴 한국이 좋아졌고, 한국에 없는 것이 없고, 세계 명품 메이커들이 모두 군침 흘리는 프리미엄 명품 시장이 한국인 만큼 세계의 온갖 좋은 물건들이 한국에 없는 게 없는 것이 사실일 겁니다. 그런데 제 생각으로 아직 미국에 있고, 캐나다에도 있는데, 한국에는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사실 그런 게 하나뿐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제가 언급하려는 것은 NAPA입니다. NAPA, 그게 뭐냐하면, 자동차 부품과 정비에 필요한 툴을 파는 체인점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에 좌우지간 좍 깔려있는 가게입니다. 맥도날드 매장만큼 매장이 많지는 않겠지만, 맥도날드 있는 곳에는 NAPA도 있다고 할만큼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가게입니다. 정비하다 필요한 자동차 부품이나 툴이 있으면, NAPA에 전화하면, 한 시간 안에 배달해줍니다.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NAPA 가게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가게는 라스베가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데스밸리에서 들렸던 가게입니다. 데스밸리는 여름이면 대기온이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입니다. 그곳은 노아의 홍수때 바닷물에 덮혔기 때문에 물이 모두 증발한 후에 소금밭이 남아있습니다. 여름에 그곳에 들리면 여름의 극한 온도에서 자동차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하여 지엠같은 자동차 회사가 시험차 수십대를 가지고 와서 연구원들이 테스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거기에 갔던 이유도 현대 자동차의 신차를 테스트하기 위해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막 한가운데도 조그만 동네가 있고, 심지어는 NAPA 가게까지 있어서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그 가게에 들려 이것저것 둘러보며 구경하다, 조그만 모형 자동차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주인이 와서 저의 그 모습을 보더만 “너 그거 마음에 들어? 가져” 그래서 그걸 선물로 받아온 기억도 있습니다. 자동차 딜러샵에서 일하는 테크니션들이 가장 좋아하는 툴 브랜드는 Snap on입니다. 이것은 매장이 있는 것이 아니고, 툴을 실은 트럭이 딜러나 정비업소

용서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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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여정 교회에서 설교 중에 용서를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목회자를 간혹 봅니다. 사람이 진짜 하기 어려운 일인데 그걸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하며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 정말 너무 인생 쉽게 살았고, 고뇌해 본 적 없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연구하거나 공부해보지 않은 것같기도 하고, 사람들 마음 깊이 헤아려보려고 애써본 적도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인간 영혼 속에 뿌리박힌 증오와 분노, 용서하지 못함을 극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암을 극복하는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어려운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평생 고민하고 배워나가야 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공부하느라고 허비한(?) 16년 동안의 세월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를 긴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병(?)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병원이 육체의 병을 고치는 곳이라면,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치유하고 고치는 역할을 교회와 목회자와 교인이 담당해야 할 사명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세상 사람들은 가당치도 않다고 비웃겠지요. 오늘날 교회의 위상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리고 초대 교회 시절에는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되살리는 치유와 기적이 있었습니다. 용서 못함이 치유되는 그 여정을 함께 하며 영혼이 괴로워하는 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와 섬김으로 서로 돕고, 시간과 감정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상처 있는 사람인데, 내 상처도 고치지 못하고 있는데, 남을 어떻게 도와?”  용서는 자기가 용서해야할 사람을 찾아가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며 뻘짓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작 그 사람은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하고 전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설교하는 목사는 증오의 대상자를 찾아가 용서하라고 합니다. 얼마나 생각없고 어리석은 일인지 모를 일입니다. 용서는 스스로 자신의 영혼

변소에서 화장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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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에서 화장실로 화장실 있는 아파트에서 태어난 애들은 변소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겁니다. 반대로 변소를 사용하던 시절의 사람들은 한국의 미래에 화장실이라는 말이 등장할 줄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시절을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미래에서 온 사람이 화장실이라는 말을 꺼냈다면 그 말을 들은 그 당시의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를 상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자들 얼굴 화장 고치는 방, 아니면 시체 태우는 화장터, 둘 중 하나를 상상하지 않았을까요? 똥 누는 곳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 똥간에서 무슨 화장을 혀?” 뭐 그렇게 기가 차지도 않다는듯 혀를 찼겠지요. 그럴만한 것이 변소, 말 그대로 똥 있는 장소가 변소였습니다. 변소에서 똥 퍼서 배추밭에 뿌려 농사짓던 시절의 똥간을 점잖게 이야기해서 변소인 겁니다. 그 시절의 변소의 모양이 조금 현대식으로 바뀐 모양이 요즘 외진 캐나다 캠핑장에 가면 보이는, 혹은 공사장 주변에서 보이는 간이 이동식 화장실입니다. 당시 한국의 변소는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거기에 똥과 오줌이 떨어지도록 사람이 디디고 설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길쭉한 네모 구멍을 만들어 그리로 오줌과 똥을 내리는 겁니다. 때맞춰 똥을 퍼내지 않으면 똥이 발판 구멍 너머 쌓이고, 똥보다 오줌이 더 많은 경우에는 똥을 내리는 중에 똥물이 튀어 소중한 궁디에 묻는 것이 일상인 시절이었습니다. “세계적인 K-Pop 문화의 우아한 한국에 그런 시절이 있었다구?” 있었습니다. 동네 골목마다 그런 변소들이 있었고, 거기서 퍼낸 똥오줌을 세상 온 밭에 뿌려대었으니, 그 시절에는 어딜 가나 똥냄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냄새뿐만이 아니라, 볼 일 보고 밑을 닦아내는 일 또한 대단한 밋션이었습니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화장지를 구경도 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신문지가 최고의 뒷처리 수단이었습니다. 넘친 똥을 피해 까치발로 간신히 발을 디디고 일을 본 다음, 뻣뻣한 신문지를 구기고 비벼 최대한 부드럽게 만든 다

선을 긋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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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긋는교회 아무리 지식인이라고 해도 성경을 읽지 않고, 성경을 모르고, 예수를 모르고, 당연히 주님의 창조를 믿지 못하면, 저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저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한 사람과 믿는 사람 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참 허망한 기분이 듭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그 사람이지만, 믿는 사람들이 참 부끄러운 사람들이 많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이 전광훈 목사를 이야기합니다. 전광훈이 목사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인간쓰레기입니다. 이 사람이 사람을 잘 못만나고 다녔네. 교회 다니는 사람들하고 말하면 어휘가 참 단순하다고? 그런 사람들만 만나고 보아서 그렇지.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시게 이 양반아, 성경에 얼마나 아름답고 다채로운 말들이 많은데. 바이블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출판되고, 가장 많이 읽힌 책이고, 세계적인 석학들과 문호들에게 영혼 깊은 영감을 주고 그 영감으로 쓴 글과 소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모르는가? 자신이 똑똑한 줄 아는 모양인데, 보니 정말 헛똑똑이군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의 눈에라도, 기독교인은 정말 믿는 사람다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또 허무한 사실이긴 합니다. 믿는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고 같이 믿고 싶어져야 맞는 이야기인데, 반대로 믿는 사람들 사는 모습 보고 기독교가 싸잡아 욕을 먹고 있으니 참 한심한 일이긴 합니다. 선을 허물어야 하는 교회가 선을 긋는 교회로. 김갑수가 하는 이야기들 중에 많은 부분이 돈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그건 맞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설교 중에 돈 이야기하지 않는 목사라도 예배 마지막에 축도를 하면서 “빈손으로 오지 않고”라는 말을 넣지 않는 목사는 거의 없습니다. 목사 배출하는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겠지요? 선을 긋지 말고 허물며 누구에게나 복음 전파하는 것이 사명이거늘, 빈손으로 오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 오늘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 목사들이 김갑수같은 사람들의 눈에는 양복입

왜 사람이 진화의 최종단계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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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이 진화의 최종단계이어야 하는가? 단세포가 진화하여 사람까지 되었다면, 사람 이후에는 왜 진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진화의 최종 목표가 사람이었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왜 진화를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 처럼 이야기하는가? 진화를 왜 마치 조물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가? 창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창조주에 대항할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이 진화인가? 진화가 창조주에 대항할만한 능력자인가? 정신 차리고 조금만 다시 생각해보면, 진화는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모순 투성이인 사람이 만들어낸 어설픈 이론이고 가설일 뿐입니다. 단세포가 진화하여 어찌어찌 원숭이까지 되었고,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면, 원숭이도 많고 사람도 많은 이 세상에 원숭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아직도 진화를 진행 중인 그 연속적인 진화의 개체들은 다 어디 숨어있는 것인가? 사람이 진화의 산물이라면 원숭이도 아닌 것이, 사람도 아닌 것이, 그런 이상한 것이 이 세상에 원숭이보다도 많고, 사람보다도 더 많아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논리 아닌가요? 흑인이, 황인종이, 아메리카 인디언이 그 중간 단계인가요? 진화가 사실이라면, 사람보다 더 멋있고, 능력있고, 슈퍼맨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가 계속 사람에 이어 이 세상 어딘가에 아니 우리 주변에 득실거리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득실거리기는 커녕 비정상적인 사람이 더 많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요? 몸보다도 정신이 더 병신인 것들이 더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요? 게이, 동성연애자, ADHD, 정신병자, 범죄자, 이런 것들이 사람으로부터 더 진화를 거듭한 산물인가요? 자가당착에 빠진 진화론자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화로 이 세상이 생겨났는데, 진화의 최종 단계는 사람인 것으로 스스로 그렇게 정의해버린 이유는 진화론이 태동할 당시의 세계적인 역사적 사조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노예 거래, 산업혁명, 금속활자에 의한 출판물의 대량생산,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르네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