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여정

용서의 여정




교회에서 설교 중에 용서를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목회자를 간혹 봅니다. 사람이 진짜 하기 어려운 일인데 그걸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하며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 정말 너무 인생 쉽게 살았고, 고뇌해 본 적 없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연구하거나 공부해보지 않은 것같기도 하고, 사람들 마음 깊이 헤아려보려고 애써본 적도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인간 영혼 속에 뿌리박힌 증오와 분노, 용서하지 못함을 극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암을 극복하는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어려운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평생 고민하고 배워나가야 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공부하느라고 허비한(?) 16년 동안의 세월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를 긴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병(?)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병원이 육체의 병을 고치는 곳이라면,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치유하고 고치는 역할을 교회와 목회자와 교인이 담당해야 할 사명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세상 사람들은 가당치도 않다고 비웃겠지요. 오늘날 교회의 위상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리고 초대 교회 시절에는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되살리는 치유와 기적이 있었습니다.


용서 못함이 치유되는 그 여정을 함께 하며 영혼이 괴로워하는 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와 섬김으로 서로 돕고, 시간과 감정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상처 있는 사람인데, 내 상처도 고치지 못하고 있는데, 남을 어떻게 도와?” 


용서는 자기가 용서해야할 사람을 찾아가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며 뻘짓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작 그 사람은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하고 전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설교하는 목사는 증오의 대상자를 찾아가 용서하라고 합니다. 얼마나 생각없고 어리석은 일인지 모를 일입니다. 용서는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입니다. 마귀의 궤계에 넘어간 마음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이제 그 영혼 속 깊은 쓴뿌리를 뽑아내고, 쓴뿌리에 쩔은 내 영혼을 십자가에 때려박아 죽여버리고, 원망과 증오로 가득 찼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예수님 품 안에서 완전한 자유함을 얻어 자유롭게 자신의 앞에 펼쳐진 인생을 살아가라는 메시지입니다.


용서는 한 마디로 혹은 한 순간의 어떤 행동과 마음가짐으로 일단락되는 그런 간단히 일이 아닙니다. 진화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장구한 세월만큼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용서못함이 교회 안에서 치유되는 역사가 선교사역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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