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ready but Not Yet - 균형잡힌 기독교 - 복음과 현실의 고통 사이
Already but Not Yet - 균형잡힌 기독교 - 복음과 현실의 고통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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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적 부흥시기에 같이 부흥한 것이 한국의 교회입니다. 오늘날 그 오래된 묵은 된장통의 뚜껑을 열어보니 잘 숙성된 하늘이 내려준 구수한 씨앗 된장의 냄새가 아니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썩은 똥냄새(엘리트주의에 찌든 극우 정교유착)가 나고 있지만 말입니다.
좌우지간 그 부흥의 역사 속에 그런 똥냄새가 진동하는 흑역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기능을 하며 기독교 복음 전파에 공헌한 교회와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지내온 한국의 기독교 역사 속에 모든 교회가 복음 위에 올바로 선 것은 아니고 신천지 같은 극단적인 이단은 물론이고, 금전 앞에 무너지며 목회를 세습하는 전혀 성경적이지 못한 이단 이상의 엉터리 대형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생산되었는지(?) 모릅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상식과 분별력을 잃으면 극우화되고 폭력화 되는 것처럼, 교회와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목회자가 분별력을 잃은 사회 속에서 성도들이 상식과 분별력을 잃지 말고 복음에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목사, 성도 구분 할 것 없이 복음에 관하여는 흔들림 없는 상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들은 얼마나 복음 위에 똑바로 서있습니까? 한국의 바울이라고 할 수 있는 하용조 목사가 사역하던 온누리 교회의 이재훈 목사는 윤석열을 지원하며 정교유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었던 김장환도 썩은 고인물인 것을 세상이 알게 되었습니다. 대형교회 목사가 그리 썩고 분별력이 없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조용기목사가 사역한 순복음 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이 가난하고 삶에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아 필요가 간절했던 시절, 그런 환경을 절묘하게 이용하여 복을 강조하며, 교회를 폭발적으로 키웠습니다. 기독교를 부흥시킨 긍정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교회를 비즈니스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고, 기독교 신앙에 기복신앙을 심는 부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 들여다 보면 신약에서 예수님은 복음에 중심을 두고 전 복음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스토리(역사) 속에서는 고난 속에서도 복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욥 모두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더 중요할까요? 복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이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피력하기 전에 먼저 단호하게 짚고 결론 짓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복신앙은 잘못된 것인가? 제가 내리는 결론은 나쁘다입니다. 왜냐 하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받은 복을 남에게도 공유하고 나누는 믿음이 대부분의 경우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이기심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고, 교회가 욕먹고 있는 이유이고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이 정말 더 나쁜 이유는 믿음이 주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은 복음을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주님을 요술 램프 속의 지니로 여기는 주술적인 믿음입니다. 그래서 기복 신앙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복신앙이 힌국 기독교 부흥에 기여한 공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복신앙은, 복 주시는 주님을 외친 목회자들이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인 일등 공신일 수 있습니다. 개와 산책하면서 개의 입에 하나씩 넣어주는 개껌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 시점에서, 북미와 한국은 물론 유럽을 포함한 교회가 한 때 포화상태로 천장을 쳤던 사회에서 교회가 외면받고, 욕먹고, 성도가 줄어들고, 교회가 비고, 교회가 팔려나가 모스크로 바뀌고, 카페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제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가다듬고 복음에 대한 상식과 분별력을 회복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실 삶 속의 고난을 외면하고 복음만을 강조하는 목회만이 존재해야 하는가? 교회 재정을 위하여 믿기만 하면 복 주시는 주님만을 강조하면서 헌금을 강조하는 인기있는 비즈니스식 목회만이 교회가 살 길인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해야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헌금 많이 거두어서 재정적으로 성공한 교회들은 한국의 순복음교회가 대표적이고, 미국은 번영신학(Prosperity Gaspe)을 표방하는 로버트 슐러 목사의 수정 교회(Crystal Cathedral)와 조엘 오스틴(Joel Osteen)의 레이크우드 교회가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조엘 오스틴의 집은 구글맵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저택 수준을 넘어 거의 성같은 규모입니다. 그런 정도의 집이 그 교회 성도들 집 중에서 제일 못사는 성도의 집과 같은 수준이라면 뭐 딱히 크게 딴지를 걸만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그만 하우스 가지고 몰기지도 내지 못해 어려운 성도들이 낸 헌금으로 목사가 그런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고 있다면 그 교회는, 그 목사는, 그 목회는 뭔가요? 이단이고 사기 수준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복을 교회 비즈니스의 수단으로 삼는 교회를 이단으로 보고 기복신앙을 기독교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우성친 “헌금하면 부자된다”는 것은 목회자의 양심을 판, 희망고문이고 영적기만입니다.
하지만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위한 그 모든 준비를 마치신 다음에 마지막 날에 사람을 지으신 주님이 사람에게 복 주시는 주님인데 복을 백안시하는 것 또한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 다음에 복을 두기를 원합니다. 복을 먼저 마음에 두는 것은 십자가를 진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중심에 주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먼저 두는 것이 복음을 중시하는 마음이고, 주님만으로 만사 오케이다라고 하는 복음 중심의 마음이 올바른 성도의 마음이 되어야 기독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주님이 사람 마음이 어떻다고 좌지우지 되실 분이 아니기 때문에 똑바로 이야기하자면 주님 앞에 바르게 선 모습은 복음이 중심에 자리잡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뿌리에서 축복의 열매가 맺혀야 되고, 그 열매의 맛은 나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어야 합니다. 번영신학을 추종하는 세력의 삶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아서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싫어하고 엘러지를 내는 것입니다.
균형잡힌 기독교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현대 복음주의의 거장인 존 스토트(John Stott)가 있습니다. 그 분이 주장하는 바는 한 귀로는 복음을 듣고, 다른 귀로는 현실적인 고통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인의 영혼구원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현실적인 배고픔과 고통에도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녁 당장 어린 아이에게 먹일 저녁거리가 없어 고통스러운 가족에게 고난만을 강조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이고 깐데 한번 더 까는 심술이나 양아치같은 짓밖에 되지 않는 일입니다. 교회가 할 역할을 그 부분에서 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도움과 함께 희망이 되는 축복의 메시지가 그들이 무너진 영혼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를 맛보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의 손길을 통해서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에서도 복음, 고난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복음과 현실적인 축복의 메시지가 조화를 이루고 교회의 역할과 성도의 역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오늘날 목회자들이 정말 고민하고 하늘의 도움과 지혜를 구하는 자세와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믿는 사람들이 상식과 분별력을 잃지 않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그런 기도가 필요한 것이지, 자기를 위한 복만을 기도 시간에 아우성 치는 것은 그건 너무 야비한 아우성 아닌가요? 똥냄새 나는 염불이지 그게 기도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팀 켈러(Tim Keller)도 번영 신학을 우상숭배로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난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도 경계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하여 자족의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현대인들의 가슴에 가장 와닿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앙이 생활과 동떨어진 고차원적인 교리에 머물지 말고, 먹고 자고 싸고 일하고 사랑하는 매우 구체적인 삶의 공간과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복을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나의 복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 축복을 성공이 아닌 생명력으로 해석 했습니다.
그 생명력,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와 같은 의미 아닐까요? 자기 내부를 향한 이기심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헌신. 이웃의 배고픔을 느끼며 자신의 것을 아낌없는 내어주는 생명나무. 에덴동산에서 멀어진 생명나무를 우리 자신이 스스로 찾아 실천하라고 주님이 생명 나무를 치우신 것은 아닐까요?
성경이 말하는 복은 단순히 돈이 많은 상태가 아닙니다. 관계 회복을 통해 나타나는 복(샬롬: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면 평안의 복이 찾아오고,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면 공동체가 헹복히며, 물질과의 관계가 바르면 정직한 풍요를 누립니다. 복음(말씀)은 깨어진 관계, 잘못된 질서와 생각을 바로 잡을 때, 그 결과로 복이 찾아오는 구조입니다.
기복신앙에서 벗어나려면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복을 간구하되 그건 내 복이 아니라 세상에 흘려 보내라고 주신 공적 자금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그것을 관리하고 베풀고 흐름이 어긋나지 않게 세상에 잘 흘러들어가도록 최선을 다해서 정직하게 관리하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정신이라면 목회자들이 복을 강조하는데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없이 백번 천번 복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기계도 아니고 아이언맨도 아니고 수퍼맨도 아닙니다. 강해 보이던 사람도 한순간 무너지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삶이 힘들거나 어려울때 주님의 도우심과 축복을 구하는 것은 자녀로서 당연한 권리입니다. 기복신앙이 나쁜 것이지 주를 향한 마음에 손가락질 할 일은 아닙니다.
Already,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으로 제사를 지내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는 죄의 사망에서 빠져나와 천국행 열차에 무임승차하는 큰 은혜를 이미(already) 받았습니다. 하지만(but Not Yet) 현실은 여전히 질병, 죽음, 가난, 죄의 유혹이 존재하는 험한 세상입니다. 눈물과 고통이 사라진 완전한 복은 미래에 다가올 일입니다. 어려움이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균형있는 믿음 생활을 유지할 것인가는 성도들이 안고 있는 큰 도전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이 상식과 분별력으로 확실히 가지고 있어야 할 믿음 세가지를 꼽아 봅니다.
첫째,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모든 결핍과 아픔을 아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두번째, 무엇보다 성도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는 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걸 복으로 믿는 믿음이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고난이 축복이다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로서 내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받은 복을 이웃과 나누는 사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내 삶을 이웃과 사회를 위해 어떻게 가치있게 쓸 것인가를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늘 감사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면 그 길이 열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 자신 자체가 주님이 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죽는 순간까지 기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미흡한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주신 성의와 시간 내어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밴쿠버의 시원한 바람처럼 기분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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