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의 헌금
과부의 헌금
미국 공무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목이 팍팍 잘려나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됩니까? 트럼프가 미친 놈 하나를 연방 정부 효율부 장관 자리에 앉혀놓으니 이 놈이 미국 정부 예산을 절감한답시고 하는 일이 공무원 일자리 박탈하는 일입니다. 돈 많고 돈 잘 버는 놈 데려다 놓으면 정부를 위해서도 돈 많이 남겨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모양인데, 돈 버는 것과 예산 절감하는 일이 프로세스가 같은 일인가요? 그 동안 중국에 던져주고 미국내에서는 무너져 내린 제조업 구조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자국민의 복지도 고려한 정책을 수립해야지 단지 몇 개월 시한부 자리를 마련해주고 국가 예산 1조 달러 이상을 절감하려고 하니, 그 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람 자르는 일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미국이 민주국가입니까? 민주,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평균 임금의 중산층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가난한 사람들, 아닙니다. 돈 위주로 돌아가는 미국 사회를 보니, 미국의 국민은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고, 그 외는 그들이 부려먹고, 수탈하는 노예같은 대상일 뿐입니다. 없는 놈의 간까지 긁어 모으는, 벼룩이 간을 빼먹는 부자들이 주인인 나라가 미국입니다.
그럼 한국의 국민은 누구입니까?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 민초들입니까? 마이클 존스턴 교수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국의 부패 유형은 매우 흥미롭다.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다. 많은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 먹는다.”
한국이 그렇다고 이야기하지만 미국도 매 한가지입니다. 다를 것이 없습니다.
뭐 말이 민주주의지, 그 옛날 봉건 영주가, 왕들이 민초들을 등쳐 먹는 것이나, 현재의 미국이나 한국의 권력이 자기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을 등쳐 먹는 것이 다른 것이 하나 없습니다. 유사 이래 사람은 그런 짓을 반복하며 살았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죄스럽고, 욕심이 과하여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과부를 위하고, 망한 사람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것은 사람이 아니고 성경에 쓰여진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회복이 되어야 참 민주주의가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누가 이 사회의 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 합니까? 교회가? 교회에는 민주주의가 살아있습니까? 요즘 교회를 보면 정치 돌아가는 꼴이나 교회 돌아가는 꼴이나 하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찬양할 때만 주님 찾고, 실상하는 짓(?)은 바깥 세상과 다를 것이 하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성령의 불길이 살아있을 때만 교회가 교회 같았고, 그 외의 시간은 교회가 세상과 다를 것이 하나 없었습니다. 유사 이래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조차 교회(성전)의 모습은 민초들을 착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12:42-44]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Mk 12:42-44, NIV]
42 But a poor widow came and put in two very small copper coins, worth only a few cents.
43 Calling his disciples to him, Jesus said, "Truly I tell you, this poor widow has put more into the treasury than all the others.
44 They all gave out of their wealth; but she, out of her poverty, put in everything—all she had to live on."
마가복음의 이 예수님 말씀을 가지고 교활한 성직자들은 이 과부같이 온 재산 털어 헌금을 해야 복 받는다고 사기를 칩니다. 혹은 과부가 헌금한 금액의 크기보다도 그 헌금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미화시킵니다. 얼핏 들으면 성도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궤변이지만, 알고 보면 가증스럽고 구역질나는 소리입니다. 자신의 영화를 위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면서 "마음"이라니? 자기를 위한 부를 쌓아놓지 않으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고, 노후보장이 되지 않을 것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대상 가리지 않고 그런 헛소리를 하며 착취를 서슴치 않는 것인가요? 두려움은 마귀가 즐겨 사용하는, 사람을 미혹(迷惑)에 빠지게 하는 가장 쉬운 툴입니다. 그들은 모두 사탄의 궤계에 넘어간 인간들입니다. 예수님은 초점을 과부의 헌금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마지막 남은 생계비까지 수탈하는 성직자들의 탐욕과 타락과 비극적인 종교 시스템에 대해 탄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의 전후에 하신 말씀들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막12:39-40]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Mk 12:39-40, NIV]
39 and have the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the places of honor at banquets.
40 They devour widows' houses and for a show make lengthy prayers. These men will be punished most severely."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요? 당시는 법도 개판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재산을 회당이나 서기관들이 가져갔습니다. 여자들이 제대로 사람 대접을 받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과부는 성전에서 주는 쥐꼬리만한 배급을 받으며 정말 죽지 못해 사는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막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Mk 13:2, NIV] "Do you see all these great buildings?" replied Jesus. "Not one stone here will be left on another; every one will be thrown down."
교회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교회인데, 예수님은 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없어질 것이라고 저주를 하셨을까요? 어려운 과부의 돈조차 갈취하며, “주님께 헌금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악다구니를 치는 부패한 지도자들이 건축하는 성전에 저주를 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과부를 보신 것은 그 과부의 헌신을 보신 것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부패와 만행을 팩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부를 칭찬하거나 불쌍한 그 과부에게 도움을 준 그런 애프터 스토리가 성경에 쓰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대로 헤롯이 지은 그 성전은 무너져 없어지고, 그 일부 “통곡의 벽”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저주한 그 돌벽에 기대어 기도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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