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죄와 벌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소설 “죄와 벌”을 통해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대작을 남겼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한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사랑을 외치는 주님이 사람들에게 왜 시련을 주고, 죽이고, 심지어는 홍수로 쓸어버릴 수 있나?”   

교인뿐만이 아니고 기독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신이 되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시각을 자신의 시각으로 자신을 위하는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아서 그런 좁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을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시각에서 판단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깨우칠 것을 깨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적인 사건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일어난 것입니다. 창조주가 인간에게 준 신의 법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그리고 그 죄가 감당하게 될 처벌과 재앙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극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심지어는 죄를 범한 인간에게까지도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시선을 재앙에만 두고, 죄에 두지 않으면 성경과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약 열왕기하 6장 24절에 보면 아람 군대에 포위된 사마리아 성내의 백성들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 묘사됩니다. 아람 군대에 포위되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크게 굶주려 아이를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며, “잔인함”만을 생각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모습을 창조주의 잔인함으로만 본다면 죄악을 저지른 인간들이 자신들의 죄를 모르는 행위입니다. 그 참혹함을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댓가, 그 죄의 레벨로 볼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볼 줄 아는 지혜가 없으면 회개를 할 수도 없습니다.

우상숭배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이런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신명기 28장 53절)를 했는데도 인간의 죄악이 멈추지 않아 결국 이런 일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식인 사건에, 인간의 그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베푸시는 창조주의 은혜를 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병으로 인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성 밖에서 아군과 적군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병 환자 네명이 굶어죽으나, 잡혀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성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적진을 향해 돌격(?) 앞으로 갑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 진영으로 들어서니,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무기, 장비, 식량들을 버리고 아람 군대가 도망을 갔습니다. 사람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고, 주님이 그리 하신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배불리 먹고, 그 좋은 소식을 성 안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평상시 사람 대접 받지 못했던 가장 나약한 사람들이, 평상시 자기들을 홀대하던 잘난척하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집니다.


이 은혜 사건에 대해서도 바로 직전에 엘리사가 예언을 합니다. (열왕기하 7장 1절)

이 이야기들은 죄의 결과는 참혹하지만,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며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일을 이미 아시는 전능하신 주님, 그 분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 인간들이 또또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악을 저지르고 있을 때, 교회에 앉은 사람들만이라도 생각을 자기 자신의 일에만, 자기 자신의 마음에만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묵상에 초점을 맞추고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족(蛇足):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교제(交際), 여기 교제의 “제”자를 보면, 제사(祭祀)의 “제”자와 생김새가 비슷합니다. 교제의 “제”자는 “사이 제” 혹은 “건널 제”입니다. 제사의 “제”자는 당연히 “제사 제”입니다. 교제의 “제”자는 제사의 “제”자에 阝(언덕 부)를 하나 더 붙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소통이 원활한데, 인간들끼리의 소통은 벽(언덕)을 마주한듯 고구마같이 답답하고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언덕 부”를 갖다붙인 것일까요? 한국의 상황이 그런 상황 아닌가요? 

아니면 교제의 “제”자가 “사이 제” 혹은 “건널 제”인데, 사람 사이는 항상 일정 거리의 사이가 있고,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으니, 아무리 교제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라는 예언인가요? 이건 전적으로 제 개인적인 개그썰이니 크게 주목하실 필요는 없는 사족이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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