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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뮤직 vs 아마존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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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뮤직 vs 아마존 뮤직 *This blog post was written in Korean. To view it in English, you can use a translation app or select your web browser's translation option to view it in English. 음악 좋아하십니까? 트로트를 좋아한다면 그것도 음악 좋아하는 것 아닌가요? 모내기하면서 할아버지 할마니들이 부르던 멜로디 뭉개지고, 리듬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노동요도 어찌되었든 음악 아닌가요? 서양 음악도 음악이고, 한국에서 그 옛날 조선의 한량들과 기생들이 띠라라 마셔라 술잔 주고받으며 부르던 창도 음악입니다.  현재 미국의 팝과 락이 세상의 음악을 평정한 모양새이지만, 미국의 버클리 음대가 스페인에 캠퍼스를 연 것은 라틴 음악의 수요가 무시못할 정도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세상에 미국 팝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한국의 K-Pop은 세상 모든 장르의 음악을 양푼 비빔밥 만들어(믹싱하여) 세계인들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 결승전 공연무대를 장식한 샤킬라는 라틴계 음악과 아프리카 음악을 버무리는 가수입니다. 음악에 대해 몰랐다가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갖게되니, 음악은 인간의 음식 문화와 궤를 같이 하는 하나의 거대한 지구촌 문화이고, 인간 삶의 변화와 같이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살아있는 또하나의 인류인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일렉기타를 접하게 되면서 미국 음악을 알아가는 중에 유럽 음악의 역사까지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뭐 심도있게 파고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일렉기타가 디지털 제품인데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음악 역시 수학적 이론의 기반 위에 서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악기든 음악이든 디지털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막귀라도, 아무리 음치라도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취향 차이로 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창을 싫어할 수 있고, 뽕짝을 좋아하는 사람은 ...

지금 써놓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기억 한 조각

지금 써놓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기억 한 조각

제가 꼬맹이 시절에는 대한민국에 아직 유치원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있었는데 저만 모르고 살았던건지는. 좌우지간 제 주변에는 그리고 그후 상당기간 동안 유치원이란 것을 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이름)에 처음 들어간 것은 서울 관악구 신림 사거리 부근 개천가에 살 때였습니다. 제가 들어간 학교는 봉천동에 있는 은천 국민학교입니다. 벌써 60년 전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은천 국민학교를 마지막으로 본 건 캐나다로 이민 오기 얼마 전, 그 은천 국민학교 앞을 자동차를 타고 지나면서 본 것입니다. 그 때 제 눈을 의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운동장이 정말 코딱지만하게 보였습니다. 꼬맹이 때의 기억은 정말 끝없이 드넓은 운동장이었는데, 어른이 된 눈에는 그렇게 조그맣게 보이다니! 어른의 눈에는 꼬맹이 때 본 것보다 열배 이상 작아보였습니다.

신림동과 봉천동 일대의 구글 위성 사진을 보니, 그야말로 집들로 숨쉴 틈도 없이 모든 공간이 꽉 차있습니다. 정말 답답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꼬맹이 시절 그 드넓어 보이던 개천들도 모두 복개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저는 2월생입니다. 주로 1957년생들이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시기에 저는 58년에 일찍 태어난 죄(?) 때문에 57년생들과 섞여 학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년이면 엄청난 변화가 있는 시기에 정신적으로 1년 어린 놈이 1년 더 성장한 놈들과 섞이자니, 학교 가기 싫어 매일 엄마 치맛자락 잡고 우는 게 일이었습니다. 제게는 참으로 잔인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울보로 시작한 학교 생활이었지만 엄마 손을 놓고 어떻게 적응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없지만, 혼자 떨레떨레 학교를 오간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니 꼬불꼬불 시골길을 따라 갔으면 1km 남짓한 길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꼬맹이의 시각에서는 어른 시각보다 열배는 크고 길어 보였을 것이니, 어른으로 치면 꼬맹이가 십리 이상의 길을 매일 오간 것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집에서 학교를 가자면 관악산에서 흘러나와 1년 내내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깨끗한 신림천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리고 길을 건너 산을 올라야 했습니다. 산 쪽에 지은 초가집과 기와집을 지나로라면 감나무들도 여기저기 보였습니다. 그리고 산 위에 이르면 큰 나무들은 없고 낮은 초목과 풀들이 가득 자란 모습 너머 학교쪽으로 드넓은 논밭이 펼쳐졌습니다. 

논을 향하여 산을 내려가면 다시 큰 개천이 하나 나타납니다. 개천을 건너, 논밭을 지나면 학교로 이어지는 신작로가 나타납니다. 지금이야 아스팔트가 깔리고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지만 당시에는 그 큰 신작로도 전부 비포장이고 차가 다니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소가 끄는 우마차가 가끔 지날뿐이고, 어쩌다가 차가 한번 지나갈라 치면 차 뒤로 흙먼지와 배기가스가 범벅이 되어 휘몰아 쳤습니다. 꼬맹이들이 그 차를 쫓아가면서 배기가스 냄새를 맡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동차 매연 냄새가 뭐가 좋다고 그걸 쫓아가면서 흡입했는지? 정말 철없던 개구장이 시절이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얼마되지 않은 시절이라 산들은 거의 전부 민둥산이었고, 신작로를 따라 미루나무인지 플러타너스인지 키 큰 나무를 듬성듬성 심어놓았습니다. 여름이면 뙤약볕을 맞으면서 학교를 다녔고, 그 옛날 겨울이면 정말 추웠는데 그 추위를 뚫고 언손을 불어가며 꼬맹이가 학교를 다닌 것입니다.

여름철 학교를 파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노는 길입니다. 논에서 벼메뚜기를 잡고, 논두렁 물길에서 미꾸라지, 버들붕어, 물방개 등을 잡으며 놀다가, 산 위에 올라가서는 종달새 둥지를 뒤지는 것이 하루 일과 중에 포함된 일입니다.

그걸로 끝나지 않고 산을 내려와 집 앞 개천에 이르면 집에 바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개천가에 책가방을 놓고는 개천물에 뛰어들어 모래무지와 피라미를 잡으며 노는 것까지 마쳐야 그제야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밥 먹고 노곤한 몸으로 하기 싫은 숙제를 졸며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고. 그렇게 깨끗하고 물고기들도 많이 살던 개천이 얼마되지 않아 썩은 시궁창으로 변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전기 잘 들어오고, 집안 따뜻한 지금이 천국인 것 같지만, 살고 보니, 부족한 것 많고, 겨울에 우풍 때문에 방안이 추웠어도 그때가 오히려 더 천국이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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