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구로동
내가 살았던 구로동
-1970년대 초반 이야기
지금 2017년 8월,
입추도 지나고 8월도 말로 치닫는 이즈음, 아침저녁으론 싸늘함마저 느껴집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새벽같이 깨었습니다. 그리고 구글 지도로 1970년 초 즈음으로 날아가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 그때가 생각난 이유가 뭘까요? 어제밤 꿈자리가
뒤숭숭했습니다. 꿈에 나타난 집, 제가 살아봤던 구조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거실 지붕이 너덜거리고 그리고 비가 들이치는 개꿈을 꿨습니다.
그런 꿈 덕분이었을까요? 1970년 초,
구로동에 살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 길은 넓었지만, 차들은 거의 없어서 거의 도로 한복판까지 노점상들이 길을 차지하고 있어도 오가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그걸 단속하는 사람도 없었고, 당연히 서로 자기나름대로의
모습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구글 지도를 보니, 그 때 있던 라디오 전파상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약국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고물상의 모습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구글지도에 표시되는 구로시장과 제가 졸업한 구로남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위치를 기준으로 추정해본, 제가 그때 살던
집의 위치는 대략 아래 지도에 빨간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살던 집이 우리 부모님의 집이 아니고 세든 집이었습니다. 방 두 개가 붙어있는 조그만 집에서 부모님과 삼남매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비가 오면 도배지를
바른 천정이 젖고 물의 무게에 축처져 바로 물폭탄이 떨어질 것 같은 그런 공포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화장실은
밖으로 나가 골목으로 들어서면 나무문으로 가려진 똥간을 화장실로 여러가구가 같이 사용했습니다. 똥간에 들어서면
항상 똥이 넘쳐나 똥을 밟지 않고 피해가며 정말 잘 싸야 했습니다. 그렇게 구차한 삶이 있었던 곳입니다.
구로남 국민학교를 졸업하고는 강서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강서중학교를 찾아보니, 그 이름은 없어지고, 세일중학교로
바뀌어 있군요, 더구나 강서중학교는 사내녀석들만 다니던 중학교였는데, 세일은 남녀공학이 되었습니다. 강서중학교 길 건너에는 삼립빵 공장이 있었습니다.
해서 늘 구수한 빵냄새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 허허벌판에 삼립빵 공장과
강서중학교만 있었지 정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학교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논두렁에서 벼메뚜기도
잡고 개구리도 잡으며 놀던 기억이 납니다. 구글 지도로 보니, 강서중학교에서
집까지는 꼬불꼬불 2km 정도 될 것같은데, 그게 지금은 별 것 아니지만,
꼬맹이에게는 얼마나 긴 거리였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 길을 오가면 다리가 굵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난했어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다 클 때까지 부모님이 같이 살아계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질적으론 늘 가난했어도,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가 그 무엇보다고 큰 금은보화,
보물이었습니다. 부모님 품 안에서 천방지축 세상 모르던 철부지가 어떻게하다보니 한국을
떠나 먼 밴쿠버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 시절 없었던 것들.
그 시절엔 TV, 컴퓨터, 스마트 폰이 없었습니다. 집에 냉장고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해서 학교 파하고 집에 오면 하는 짓이 꼬맹이 들이 골목에 모여 구슬치기,
잣치기, 비석치기, 다방구 하며 해지는 줄
모르고 노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 시절 있었던 것들.
TV가 있는 집이 간혹 있었습니다. 그런 TV있는 집에 저녁 시간이 되면 꼬맹이들이 모여 만화영화를 봤습니다. 그때 본 만화영화 제목, 기억나는 것들, 마린보이,
황금박쥐, 요괴인간, 뭐 그런 것들입니다.
당연히 브라운관 TV였고, 흑백 화면이었습니다.
밴쿠버에 온 것이 2002년인데, 그때까지도
아직 평면TV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가장 급변하는 시대에 살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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